2007년 11월 07일
혹시 이 포스터를 아시나요?




삐라와 반공표어와 국가보안법
삐라 - '일제히!'라는 명령
경비행기가 날면서 무언가를 뿌려대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 '우우∼' 몰려다녔다. 햇빛에 반짝거리고 바람에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것은 자그마한 종이쪽지였다. 거기에는 "○월 ○일은 쥐잡는 날, 한 집도 빠짐없이 쥐를 잡읍시다." 뭐 이런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림이 곁들여지기도 했다. 날카로운 창이 쥐의 몸통을 관통하고 피가 솟구치는….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그림이지만, 그때 야생의 어린 아들들이었던 우리에게는 그저 시시했다. 산 쥐를 눈앞에 흔든다면 모를까. 딱지 접기에도 삐라는 작은 종이라서 대개는 그냥 버렸다. 야산에서 놀다가 급할 때는 밑씻개로 썼다.
그러나 그 삐라의 무시하지 못할 유용성은 숙제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쥐꼬리를 잘라 가져가는 것. 그것은 중요했다. 숙제는 우리가 따라야 할 규칙, 혹은 명령이었고, 야성은 규칙과 명령을 통해서 길들여졌으니까.
'○월 ○일'이 되면 어른들은 바빴다. 보건소나 읍사무소에 가서 쥐약을 타왔다. 쥐약은 보통 벼 낱알이나 밥에 비벼졌다. 이장 아저씨는 집집마다 돌며 쥐약을 타왔는지를 점검했다. 아직 타오지 못한 집에서는 이장 아저씨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장 아저씨가 하는 일은 또 있었다. 아무 때나 쥐약을 놓아서는 안 되고, 저녁 ○시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설명이 곁들여졌던 것 같다.
"어느 집에서 미리 놓으면 영리한 쥐들은 옆집으로 도망가서 미리 먹이를 잔뜩 먹어 놓는다, 그 뿐인가? 친구 쥐들한테 오늘 쥐약 놓는 날이니 조심하라고 다 알려준다, 만일 쥐약을 안 놓은 집이 있으면 더 심각하다. 동네 쥐들이 랄라거리면서 그 집으로 몽땅 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은근한 협박도 보태진다.
"쥐약 안 놓아 그 집에 양식이 다 없어지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우리 동네 실적이 나쁘다면…"
쥐잡기는 단순히 쥐 사냥이 아니라, 동네끼리의 경쟁이었다.
'저녁 ○시에 일제히', 이장 아저씨는 '일제히'에 힘을 주었다. '일제히'야 말로 쥐잡기 이벤트의 핵심이었다. '일시에, 한 집도 빠짐없이.'
행여라도 잊어먹을까 봐 저녁 ○시에는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면 온 동네 집들에서는 '일제히' 쥐약을 놓았다.
쥐잡기 행사가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쥐 시체를 거두러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끔 울타리나 길에 나와 죽어 있는 쥐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리 내놔! 이건 우리 집 쥐야."
"아니야, 우리 집 쥐야. 우리 집 쥐약 먹고 비틀거리며 왔다갔다하는 걸 봤단 말이야."
어른들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열 시면 마을 공터에서 이장은 뉘 집에서 쥐 몇 마리나 잡았는지 점검할 것이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잘라간 쥐꼬리를 검사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삐라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라는 명령이었다. '일시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명령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동네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삐라는 그 이후에도 줄곧 뿌려졌다. 재건합시다, 건설합시다,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합시다 등등. 그때마다 사람들은 '일제히!' 삐라가 명령하는 이벤트에 참여해야 했다.
반공표어 - '적을 구별하라'는 명령
초등학교 교실마다 뒤쪽 벽에 '반공 방첩'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 시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반공 방첩'이었다. '방공'인지, '반첩'인지 헷갈렸던 나는 결국 틀리고 말았다. '반공 방첩'을 틀린 다른 친구들과 나는 '보충수업'을 했다. '반공 방첩'을 공책에 가득 써서 채우는, 일종의 벌이었다.
그러나 왜 '공' 앞에는 '반'이어야 하고, '첩' 앞에는 '방'이어야 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 반 담임이었던 뚱뚱한 여자 선생님은 나를 바보 멍청이 취급에도 모자라 '정말 몰라?'를 반복하며 머리를 서너 대 갈긴 후에야 가르쳐 주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반공이고, 간첩을 막는다고 방첩이야, 알았어?'
나는 선생님께 머리를 숙임으로써 감사를 표했다. 내가 더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첩'이 간첩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막는 것이 왜 '방'인지, '공'이 공산주의라는 것은 알겠는데 공산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걸 물었다가는 아마도 내 머리는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반공 웅변대회가 있었고,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있었고, 반공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학교 가는 길 옆 담벼락에는 끔찍한 글귀들이 시뻘건 글씨로 씌어지기 시작했다. '공산당을 쳐부수자', '×××을 찢어 죽이자.'
해마다 한번씩 있었던 간첩 신고 기간인가 하는 때에는 간첩 식별 요령을 배웠다. 밤늦게 라디오를 듣는 사람, 이른 아침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산이 아니라도 아침에 바지가 이슬에 젖어 있는 사람….
한번은 조회 시간에 간첩을 신고한 친구가 경찰서장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안 받아 간 사람을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그 '간첩'은 옆 동네 청년이었다. 그는 잡혀가지도 않았고, 간첩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보면 슬슬 피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나한테도 간첩이 한번 걸려들었으면…' 했다.
음악시간에는 반공표어들로 가사를 만든 노래도 배웠다. 지금도 기억나는 표어는 이렇다.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1982년 여름, 친구들과 해남 대흥사에 가는 길에 나는 그 표어의 등산길 버전을 발견했다. "앞에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담장마다 써놓았던 '×××을 찢어 죽이자'와 같은 흉측한 표어들은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페인트로 지웠었다. 그런데 그 '등산객 간첩' 표어는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다. 땅에 박힌 쇠막대에 붙여진 둥근 철판에 씌어진 그 표어는 다른 부분은 녹이 심하게 슬었지만, 희한하게도 글자 부분만은 또렷이 읽을 수 있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공표어는 우리를 줄곧 지배해 온 또 다른 명령이었다. '왜?'라는 합리적 물음을 마비시킨다는 의미에서 주술이었다.
'우리와 적을 구별하라. 그리고 적을 색출하라.'
1970년대는 바로 반공표어의 주술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온 국민이 주술에 걸려 간첩 색출하기에 나선 것 같았다.
몸을 요란하게 움직이며 추는 춤이 성적 행위를 연상시킨다고 내 친구들이 '와쌈마 가수'('와쌈마'는 그런 몸짓을 이르는 은어이다)라고 불렀던 김추자의 와쌈마가 북으로 보내는 신호라는 거였다.
1973년 3월, 라면 과자의 효시인 '뽀빠이'가 신문 기사에 등장했다. 포장지의 도안이 적화 통일을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포장지의 뽀빠이가 입은 파란색 바지와 빨간색 상의는 남한과 북한을 의미한다, 뽀빠이 팔뚝에 그려진 닻 모양의 문신은 사실은 소련 국기를 본뜬 것이다, 종이를 오린 것 같은 뽀빠이의 배경은 우리나라의 지도다, 뽀빠이는 지도의 남쪽을 짓밟고 있다….
뽀빠이의 제조사인 삼양식품은 신문에 해명 광고를 실어야 했다. 그 후로 뽀빠이의 도안은 바뀌었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
삐라와 반공표어, 똑같이 간단한 몇 글자 적힌 종이에 불과하지만, 쇠보다도 단단하고 창보다도 날카롭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다. 김진송의 지적처럼, '슬로건 사회, 캠페인 공화국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에서 삐라와 반공표어는 '국가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표징일 뿐 아니라 사회의 저변에 깔린 의식과 문화현상의 핵심에서' 하나의 원리로 작동한다.
내 유년기의 경험으로 볼 때, '쥐잡기' 이벤트가 자발적인 동원을 강제함으로써 '우리'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방지하는 캠페인이라면, 반공표어는 '우리'로부터 '우리 아닌 다른 것'의 배척을 강제하는 슬로건이다. 그 구별은 경계심, 또는 적개심의 발동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 아닌 다른 것'은 언제나 '적'이었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것은 '일제히!'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과 '우리 아닌 적'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다.
'선과 악'의 구별처럼 '우리와 적'의 구별은 명쾌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와 '적'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아니면 '적'이다.
삐라와 반공표어, 이것이 명령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를 지배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슬로건의 샘 - 국가보안법
삐라와 반공표어 이야기를 하면 후배들은 무슨 전설같은 이야기냐며 황당해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삐라와 반공표어의 명령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 명령은 국가보안법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생겨난 이래, 삐라와 반공표어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일시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적과의 대결에 나서야 한다. 적은 '쥐'와 같은 사회적 질병이었다. 아니, 훨씬 더 위험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사망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타자인 적의 핵심은 공산주의이다. 우리의 핵심은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이라는 마술사가 삐라와 반공표어라는 피리를 불어 몰아낸 것은 '쥐'만이 아니었다. 우리도 덩달아 강물에 빠져 죽었다. 자유민주주의가 권위주의 정치 권력에 의해서 질식사한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유예되거나 무시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이 사실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을 훼손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70년대의 정치 권력은 다른 이름을 붙임으로써 곤혹스러움을 피하려고 했다. 그 이름은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한국적 상황'이란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는 적으로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되었다. '한국적 민주주의' 시대의 헌법에도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권력에 비판적이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 허용된 무늬뿐인 자유였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양심을 표출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그러나 유신시대의 한국적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물론,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폐기된 후에도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과 사상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사상을 바꾸게 하려는 노력이 집요하게 시도되었고, '사상전향'이라는 말이 1998년 폐기된 후에는 '준법서약'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사실상 사상의 전향을 강제하는 제도였다.
끊임없는 '우리'와 '적'의 편가르기, '적'을 '우리'로 강제로 편입시키기, 그래도 안 되면 배척하고 격리하기, 삐라와 표어의 명령은 사실 국가보안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배척과 격리는 지독한 것이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27년 만에 석방되었을 때 세계는 경악했었다. 그러나 1년 뒤인 1995년 김선명은 45년 만에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었다. 1999년 3월, 우용각은 41년, 당시 세계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는 14년 만에 석방되었을 때 세계는 놀라지도 않았다.
더디지만 한 걸음 더
1998년 8월 특사 때, 사상전향서 대신 준법서약서를 쓰도록 했던 정부는, 1999년 3·1절 특사 때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은 장기수 40여 명을 석방했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당시 법무부가 '준법서약서 없는 석방은 말 그대로 예외적인 법 적용'임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요즈음 국가보안법 폐지냐, 개정이냐가 논란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역사는 더디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절에 우리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처럼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기는 있었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후배들에게 '삐라와 반공표어'를 이야기하면서, 지나간 옛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삐라와 반공표어'의 명령은 여전히 완강하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교도소의 담장 안에는 여전히 양심수들이 신음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통일을 가로막는 법과 제도를 고치자고 합의했는데, 시급히 국가보안법과 같은 거추장스럽고 낡은 것들을 없애고 남과 북이 진심으로 힘을 합쳤으면 좋겠다.
# by | 2007/11/07 18:17 | 잡다 이야기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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